한국의 전통음료는 종류, 형태, 조리법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지역에서 주로 나는 특산물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또한 예로부터 차, 화채, 밀수, 식혜, 수정과, 탕, 장, 갈수, 숙수, 즙, 우유 등으로 분류하여 왔다. 우리 식생활에 깊이 우리나라 음청류의 역사와 시대별 유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삼국시대
삼국시대로 접어들면 식생활이 체계화 되어가면서 주식, 부식, 후식의 형태로 나누어짐에 따라 전통음료는 후식류로 발달하게 되었고, 조과류와 더불어 중요한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옛 식품조리서들을 보면 전통음료의 재료로서 다양한 식품재료를 사용하였다. 일상식, 별미식, 특별식, 행사식 등으로 우리의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깊은 계곡의 맑은 물과 좋은 샘물이 도처에 솟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의 감수를 가장 원초적인 음료로 즐겨 마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이 왕후를 맞는 설화 가운데는 왕후를 모시고 온 신하와 노비에게 수로왕이 음료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의 음료로 열거된 난액과 혜서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그 내용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난액은 난의 향을 곁들인 음료가 아닌가 생각되고 혜서 역시 난의 향을 곁들여 발효시킨 발효성음료일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이 책에는 쌀 20 두를 쪄서 말린 것으로 양식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미 미수 형태의 음료가 구황식과 저장식 그리고 여행식 겸 주식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옛사람들은 원시 식물의 꽃이나 열매들을 음료로서 이용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 예로 오미자는 중국의 양대의 본초학에서 우리나라의 오미자가 제일 품질이 좋다고 하였다. 특히 송대의 본초도경에는 신라에서는 박하를 말려 차를 마신다라고 하였음을 볼 때 오미자와 박하 등은 삼국시대에 이미 음료로 이용되었음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차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신라 28대 선덕여왕(632~647) 때이며 42대 홍덕왕 3년(828)에는 김대렴이 당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왕명으로 차를 지리산에 파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차는 불교문화의 도입과 함께 왕가와 승려 그리고 화랑들 사이로 전파되었다.
고려시대
신라 말기에 성행하던 차는 불교국인 고려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연등회, 팔관회, 공덕제 등 국가제의에는 반드시 차를 애하였다. 고려 때는 진다의식을 중시하여 이를 다루는 관가로서 다방이 있었으며, 다촌을 두어 다수의 재배를 맡아보게 하였다
고 한다.
차는 팔관회나 연등회 때 쓰였을 뿐만 아니라 사신을 맞이할 때도 임금이 차를 하사하였는데 주로 술을 마시기 전에 차를 내었다. 그리하여 다방에서도 차 외에 주과도 함께 다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17대 인종 원년에 우리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의 기행문인 고려도경에 의하면 음풍습이 성했으나 차의 품질개량에는 소홀하여 중국차를 수입하여 마셨
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의식은 극히 형식적이어서 차를 마시기 위한 것보다 의식을 행하는 쪽에 치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차와 관련한 풍속으로 차 씨앗이 예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혼례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채단과 예물을
보내는 풍속이 그것으로, 이것을 '봉채' 혹은 '봉'라 하는데 원래는 차를 보내는 봉차가 봉채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이 풍속은 아름답게 수놓은 자수주머니에 차 씨앗 두 개를 넣어 신부집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는 차나무는 원래 그 성질이 씨앗으로 심어야만 자라고 나무도 직근성으로 세근이 없기 때문에 옮겨 심으면 자라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나무처럼 한 번 결혼하면 절대로 정절을 옮기지 않겠다는 뜻과 또한 씨앗을 따로따로 심어도 이것이 한 나무로 합해 나오는 데서 차의 씨앗을 보내는 풍속이 유래되었다 한다. 또 씨앗이 무성해 자손이 융성하기를 바라는 뜻도 있다.
조선시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립되면서 불교를 배척하니 불교와 함께 성하고 사원과 함께 전파되었던 차도 함께 쇠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배불정책과 주자학의 대두로 차를 재배 및 제조하는 사찰의 몰락과 더불어 거기에 의지하고 있던 일반 사람들의 음다풍도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호암은 그 이유로서 '첫째, 대부분의 차를 수입하여 토산차의 개량을 꾀하지 못하였다. 둘째, 다세의 주구가 심하여 민폐가
막대하였기에 생산자의 사기를 저하시켜 차를 생산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셋째, 일반 민중이 차를 마시지 않은 때문이다.' 고 지적하고 있다.
차를 마시지 않게 된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의 자연수가 좋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며 숭늉이 이를 대신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서는 감천이 흐르고 숭늉이 보편화되어 있었고 기호품으로 이미 연초와 술이 널리 애용되어 왔다.
삼국시대부터 온돌이 발달되고 부뚜막이 생기고 부뚜막에 가마솥을 걸고 밥을 지으면서 솥 밑바닥에 눌어붙은 밥알인 누룽지에 물을 붓고 끓여 만든 구수한 숭늉이 서민의 유일한 음료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상 식생활의 과학적인 합리성이 높아지고 양생음식이 발달하면서 술, 죽, 떡, 음료류에 한약재의 쓰임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차를 마시는 대신 식혜, 화채, 수정과, 밀수 등의 음료류가 발달하게 되었다.
차만큼이나 오래 즐겨왔던 우리나라 음청류의 역사와 시대별 유래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식의 유래와 종류
다식은 볶은 곡식의 가루나 송화가루를 꿀로 반죽하여 뭉쳐서 다식판에 넣고 갖가지 문양이 나오게 박아 낸 유밀과이다. 만드는 재료가 다양하고 나무로 만든 다식판에 찍혀서 나오는 다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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